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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옥터) A코스
포도청(옥터) B코스
주교단 도보 성지순례
종로성당 → 좌포도청 터(종로3가역 9번출구) → 의금부 터(종각역 1번출구) →
형조 터(세종문화회관 앞) → 우포도청 터(광화문역 5번출구) → 전옥서 터(종각역 6번출구) → 명동성당
( 총 4.41km, 66분 소요 - 순례예상시간 1시간 30분 )
종로 성당
위치
종로구 동순라길 8 (02-765-6101)

소개
포도청 순례지 성당

기억해야 할 인물
포도청에서 순교하신 성인 22위와 복자 5위, 수많은 신앙 증거자들

묵상과 기도
서울대교구 성지 순례길을 걸으며 신앙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기억하고
그들처럼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성령의 은총을 청합시다.

*서울대교구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종로성당은 서울의 중요한 순교터이자, 최대의 신앙 증거터였던 좌⋅우 포도청과 의금부·형조·전옥서 등의 기관들을 관할 내에 두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2013년 2월 28일자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로부터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승인받았습니다.
103위 성인 중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를 포함한 22위가 포도청에서, 이호영 베드로, 김 바르바라 등 성인 2위가 전옥서에서, 그리고 124위 중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 을묘박해의 3위를 포함한 복자 5위가 포도청에서 장살·교수․옥사로 순교한 곳입니다. 또한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온갖 문초와 형벌을 당했던 곳이며,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마지막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밤을 보낸 곳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이곳에는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만 있을 뿐, 한국천주교회의 소중한 순교 터임을 알리는 내용이 없습니다.
종로성당에서는 본당 관할구역 내에 있는 좌·우포도청(옥터)에서 일어났던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적인 사건과 의미를 일깨우고 선조들의 신앙모범을 따르기 위해 성당 내에 성지순례 현양관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에는 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 22위, 전옥서에서 순교한 성인 2위, 순교 복자 5위에 관한 기록물들과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다 다른 처형지에서 순교한 증거자들에 관한 정보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포도청 순례지 안내 지도와 리플렛, 포도청 순교사 관련 소책자 및 현양관 전시물 해설안내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좌포도청 터
위치
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 앞

소개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의 순교지

기억해야 할 인물
*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들과 복자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민극가 스테파노 , 성 허임 바오로,
성 남경문 베드로, 성 임치백 요셉 복자 윤유일 바오로, 복자 최인길 마티아, 복자 지황 사바

*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들과 복자들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 성 장성집 요셉, 성녀 이 바르바라, 성녀 김 루치아,
성녀 조 막달레나, 성녀 유 체칠리아, 성녀 김 데레사, 성녀 이 아가타,
성 정화경 안드레아, 성 김성우 안토니오, 복녀 심아기 바르바라,
복자 김이우 바르나바

묵상과 기도
하느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좌포도청은 중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과거 서울 종로구 단성사 일대)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서울 동․남․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던 경찰서로 중종 이후 포도청으로 존속하다가 고종 31년 7월 경무청으로 개편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에 대한 기찰이나 체포가 금조에 포함된 것은 고종 때 부터인데, 실제 규정과는 달리 천주교 신자들의 기찰⋅체포에 대한 임무는 그 이전부터 수행되어 왔으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는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던 혹독한 형벌(濫刑)이 행해져, 이곳에서 장살, 교수, 옥사 등의 순교가 이루어졌습니다.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하게 된 것은 1795년 북산사건으로 발생한 을묘박해 때가 최초였습니다.
박해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는데, 특히 기록상 명확히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분으로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민극가 스테파노, 허임 바오로, 남경문 베드로, 임치백 요셉 성인이 있으며, 1795년 을묘박해 때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도 좌포도청으로 끌려와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또한, 기해박해 때 성인 중 70명이 포도청에서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았는데, 정하상 바오로,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까지 신앙을 증거했던 곳이 바로 좌포도청입니다.
좌포도청의 표지석은 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 앞에 있습니다.
의금부 터
위치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번 출구 SC제일은행 앞 화단

소개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국문을 받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 신앙 증거자들
이승훈 베드로, 권철신 암브로시오,
복자 주문모 야고보, 복자 최창현 요한
성 정하상 바오로, 성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성 모방(나) 베드로,
성 샤스탕(정) 야고보, 성 베르뇌(장) 시메온, 성 브르트니에르(백) 유스토,
성 도리(김) 베드로, 성 볼리외(서) 루도비코 성 전장운 요한, 성 최형 베드로, 성 정의배 마르코

묵상과 기도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앙의 선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금오·왕부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이승훈 베드로가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가 순교한 이래 많은 천주교 선교사와 지도층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1801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최창현 요한 회장도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했고,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 정하상 바오로 성인 등 주교나 신부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혹독한 국문과 문초를 겪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베르뇌(장) 시메온 주교, 브르트니에르(백) 유스토 신부, 도리(김) 베드로 신부, 볼리외(서) 루도비코 신부들과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정의배 마르코 성인도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하며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현재 의금부 터 표지석은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호선 1번 출구 SC제일은행 앞 화단에 있습니다.

형조 터
위치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 보도

소개
천주교인들이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신앙 증거자들
김범우 토마스
복자 최필공 토마스, 복자 최필제 베드로, 복녀 윤운혜 루치아,
복자 정철상 가롤로 복자 김천애 안드레아,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 남명혁 다미아노,
성녀 김효임 골롬바, 성녀 김효주 아네스, 성 김제준 이냐시오,
성 전장운 요한, 성 최형 베드로

묵상과 기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모든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읍시다.

형조는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입니다.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라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 최필제 베드로 ․ 윤운혜 루치아 ․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 남명혁 다미아노 ․ 김효임 골롬바 ․ 김효주 아네스 ․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습니다. 형조 터 표시는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에서 세종로공원 정문 쪽 도로 바닥에 매입되어 있습니다.
우포도청 터
위치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

소개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의 순교지

기억해야 할 인물
*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들
  성녀 김임이, 성녀 이간난, 성녀 정철염

(좌・우) 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들과 복자들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 성 장성집 요셉, 성녀 이 바르바라, 성녀 김 루치아,
성녀 조 막달레나, 성녀 유 체칠리아, 성녀 김 데레사, 성녀 이 아가타,
성 정화경 안드레아, 성 김성우 안토니오, 복녀 심아기 바르바라,
복자 김이우 바르나바

묵상과 기도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우포도청은 조선 중종 무렵 설치되어 1894년까지 350여 년 동안 존속된 서울의 포도⋅순라 기관으로 중부 서린방 혜정교 남쪽 인근(현 동아미디어센터 자리)에 위치하였으며, 우포도청이 담당한 구역은 서울의 서부⋅북부와 경기우도 등지였습니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는데, 특히 기록상 명확히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열 세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유대철 베드로 성인이 있으며, 병오박해 때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가타리나도 우포도청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혹독한 매질 아래 순교했습니다.
병오박해 때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밤을 보낸 곳도 우포도청입니다.
기해일기를 펴낸 현석문 가롤로 성인도 김임이 데레사, 정철염 가타리나와 함께 체포되어 우포도청에서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순교로 나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며 순교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입니다. 1879년 드게트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우포도청에 수감되었던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르는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은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포도청 터 표지석은 현재 종로1가 89번지 일민미술관과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에 있습니다.
전옥서 터
위치
종로구 종로1가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

소개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이호영, 성녀 김 바르바라

묵상과 기도
말이 아니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영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전옥서는 형조에 속한 감옥으로,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였습니다.
전옥서는 남자 옥사와 여자 옥사로 구분 되어 있었고,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지만, 때에 따라 왕족이나 양반, 관리 출신의 죄인들도 수감되었습니다.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습니다.
103위 성인 중 전옥서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혹독한 감옥생활로 순교한 성인이 이호영 베드로와 김 바르바라입니다.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성녀 이소사 아가타의 동생으로 1835년 누나와 함께 체포되어 1839년 형이 집행되기까지 4년 동안의 혹독한 옥살이 끝에 얻은 병과 옥고로 순교한 곳이 바로 전옥서입니다. 성녀 김바르바라도 포도청으로 끌려가 거기서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고, 전옥서에서의 3개월 간의 옥살이 끝에 굶주림, 기갈, 염병 등으로 옥사함으로써 전옥서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도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습니다. 형조 아래의 감옥이었던 전옥서는 1785년의 명례방사건 때 김범우 토마스가 형조에 끌려가 신앙을 증거한 이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옥서 터 표지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에 있습니다.
명동 대성당
위치
중구 명동 2가 1 (02-774-1784)

소개
한국 교회 최초의 본당이며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의 유해가 모셔진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성 샤스탕·푸르티에·프티니콜라 신부, 성 최경환, 성 김성우, 이 에메렌시아, 무명 순교자 1명

함께 볼 곳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명동 대성당 성모동산 뒤) 지하 묘역(지하 소성당 내)

묵상과 기도
자주 고해성사를 보고 진실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기도합시다.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명동 일대는 옛날 조선 ‘한성부 남부 명례동(明禮洞)’에 속하던 지역입니다. 지금은 주위 고층빌딩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북달재’라고 불리던 남산 북녘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 대성당은 도성 내 어느 곳에서나 올려다 보이던, 뾰족탑이 인상적인 서양식 교회 건물로 세인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면서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자, 교회 당국은 1882년 4월에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종현 본당, 지금의 명동 본당을 설정했습니다. 이후 1882년 7월 26일에 부주교로 임명된 블랑 신부가 신병으로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 요양 중이던 리델 주교가 1884년에 선종하면서 조선대목구 제7대 교구장직을 승계하였습니다.
1890년 블랑 주교가 사망한 후 제8대 교구장 주교로 착좌한 뮈텔 주교는 1892년 조선 최초의 서양식 대성당 건축을 착공하게 되었습니다.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성당을 짓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공사 현장의 중국인 기능공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1년 이상이나 공사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 종결 후 공사를 재개하였으나 준공을 앞두고 공사를 감독하던 코스트 신부가 선종하는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연거푸 발생하였지만 푸아넬 신부가 대신 마지막 공사를 서둘러 1898년 5월 29일에 대성당 축성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명동 대성당의 지하 소성당 묘역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설계 때부터 계획된 시설로서, 시복 수속 작업의 일환으로 각지에서 발굴된 순교자들의 유해가 1900년부터 이곳으로 옮겨져 안치되었습니다. 현재 명동 지하 성당에는 순교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 등 모두 아홉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김성우 안토니오, 순교자 이 에메렌시아, 무명 순교자 1명,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모셔져 있어, 기도와 참배를 위해 찾는 순례자들이 많은 성역입니다. 이 가운데 이 에메렌시아는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