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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옥터) A코스
포도청(옥터) B코스
주교단 도보 성지순례
종로성당 → 좌포도청 터(종로3가역 9번출구) → 의금부 터(종각역 1번출구) → 전옥서 터(종각역 6번출구) →
우포도청 터(광화문역 5번출구) → 형조 터(세종문화회관 앞) → 경기감영 터(적십자병원 앞) → 서소문밖 성지 → 중림동 약현성당
( 총 5.19km, 78분 소요 - 순례예상시간 2시간 )
종로 성당
위치
종로구 인의동 167 (02-765-6101)

소개
포도청 순례지 성당

기억해야 할 인물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성당 지하)

묵상과 기도
서울대교구 성지 순례길을 걸으며 신앙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기억하고
그들처럼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성령의 은총을 청합시다.

*서울대교구 성지순례 안내 센터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종로 성당은 종로구 인의동 167번지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종로 본당은 2013년 2월 28일자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로부터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승인받았습니다.
포도청 순교지는 103위 성인 중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 허임 바오로 등 스물한 분, 현재 시복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124위 중 윤유일 바오로 등 5위가 장살, 옥사, 교수 등으로 순교한 곳입니다.
그러나 현재 좌·우포도청 터를 알리는 표지석에는 그곳이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터임을 알리는 내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종로 본당에서는 본당 관할 구역 내에 있는 좌·우포도청에서 일어났던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인 사건과 의미를 일깨우기 위해 성당 내에 서울대교구 성지순례 안내소를 설치함과 동시에 서울시에 순교터 표석 설치를 요청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안내소에는 포도청 순례지 안내 지도와 리플릿, 그리고 조선 후기 포도청과 천주교 순교사를 정리한 ‘포도청 순례’ 안내책자도 구비되어 있습니다.
좌포도청 터
위치
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 앞

소개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의 순교지

기억해야 할 인물
*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들과 복자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민극가 스테파노 , 성 허임 바오로,
성 남경문 베드로, 성 임치백 요셉 복자 윤유일 바오로, 복자 최인길 마티아, 복자 지황 사바

*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들과 복자들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 성 장성집 요셉, 성녀 이 바르바라, 성녀 김 루치아,
성녀 조 막달레나, 성녀 유 체칠리아, 성녀 김 데레사, 성녀 이 아가타,
성 정화경 안드레아, 성 김성우 안토니오, 복녀 심아기 바르바라,
복자 김이우 바르나바

묵상과 기도
하느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좌포도청은 중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과거 서울 종로구 단성사 일대)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서울 동․남․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던 경찰서로 중종 이후 포도청으로 존속하다가 고종 31년 7월 경무청으로 개편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에 대한 기찰이나 체포가 금조에 포함된 것은 고종 때 부터인데, 실제 규정과는 달리 천주교 신자들의 기찰⋅체포에 대한 임무는 그 이전부터 수행되어 왔으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는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던 혹독한 형벌(濫刑)이 행해져, 이곳에서 장살, 교수, 옥사 등의 순교가 이루어졌습니다.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하게 된 것은 1795년 북산사건으로 발생한 을묘박해 때가 최초였습니다.
박해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는데, 특히 기록상 명확히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분으로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민극가 스테파노, 허임 바오로, 남경문 베드로, 임치백 요셉 성인이 있으며, 1795년 을묘박해 때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도 좌포도청으로 끌려와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또한, 기해박해 때 성인 중 70명이 포도청에서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았는데, 정하상 바오로,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까지 신앙을 증거했던 곳이 바로 좌포도청입니다.
좌포도청의 표지석은 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 앞에 있습니다.
의금부 터
위치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번 출구 SC제일은행 앞 화단

소개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국문을 받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 신앙 증거자들
이승훈 베드로, 권철신 암브로시오,
복자 주문모 야고보, 복자 최창현 요한
성 정하상 바오로, 성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성 모방(나) 베드로,
성 샤스탕(정) 야고보, 성 베르뇌(장) 시메온, 성 브르트니에르(백) 유스토,
성 도리(김) 베드로, 성 볼리외(서) 루도비코 성 전장운 요한, 성 최형 베드로, 성 정의배 마르코

묵상과 기도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앙의 선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금오·왕부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이승훈 베드로가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가 순교한 이래 많은 천주교 선교사와 지도층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1801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최창현 요한 회장도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했고,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 정하상 바오로 성인 등 주교나 신부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혹독한 국문과 문초를 겪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베르뇌(장) 시메온 주교, 브르트니에르(백) 유스토 신부, 도리(김) 베드로 신부, 볼리외(서) 루도비코 신부들과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정의배 마르코 성인도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하며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현재 의금부 터 표지석은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호선 1번 출구 SC제일은행 앞 화단에 있습니다.

전옥서 터
위치
종로구 종로1가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

소개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이호영, 성녀 김 바르바라

묵상과 기도
말이 아니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영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전옥서는 형조에 속한 감옥으로,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였습니다.
전옥서는 남자 옥사와 여자 옥사로 구분 되어 있었고,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지만, 때에 따라 왕족이나 양반, 관리 출신의 죄인들도 수감되었습니다.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습니다.
103위 성인 중 전옥서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혹독한 감옥생활로 순교한 성인이 이호영 베드로와 김 바르바라입니다.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성녀 이소사 아가타의 동생으로 1835년 누나와 함께 체포되어 1839년 형이 집행되기까지 4년 동안의 혹독한 옥살이 끝에 얻은 병과 옥고로 순교한 곳이 바로 전옥서입니다. 성녀 김바르바라도 포도청으로 끌려가 거기서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고, 전옥서에서의 3개월 간의 옥살이 끝에 굶주림, 기갈, 염병 등으로 옥사함으로써 전옥서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도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습니다. 형조 아래의 감옥이었던 전옥서는 1785년의 명례방사건 때 김범우 토마스가 형조에 끌려가 신앙을 증거한 이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옥서 터 표지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에 있습니다.
우포도청 터
위치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

소개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의 순교지

기억해야 할 인물
*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들
  성녀 김임이, 성녀 이간난, 성녀 정철염

(좌・우) 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들과 복자들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 성 장성집 요셉, 성녀 이 바르바라, 성녀 김 루치아,
성녀 조 막달레나, 성녀 유 체칠리아, 성녀 김 데레사, 성녀 이 아가타,
성 정화경 안드레아, 성 김성우 안토니오, 복녀 심아기 바르바라,
복자 김이우 바르나바

묵상과 기도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우포도청은 조선 중종 무렵 설치되어 1894년까지 350여 년 동안 존속된 서울의 포도⋅순라 기관으로 중부 서린방 혜정교 남쪽 인근(현 동아미디어센터 자리)에 위치하였으며, 우포도청이 담당한 구역은 서울의 서부⋅북부와 경기우도 등지였습니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는데, 특히 기록상 명확히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열 세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유대철 베드로 성인이 있으며, 병오박해 때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가타리나도 우포도청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혹독한 매질 아래 순교했습니다.
병오박해 때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밤을 보낸 곳도 우포도청입니다.
기해일기를 펴낸 현석문 가롤로 성인도 김임이 데레사, 정철염 가타리나와 함께 체포되어 우포도청에서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순교로 나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며 순교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입니다. 1879년 드게트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우포도청에 수감되었던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르는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은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포도청 터 표지석은 현재 종로1가 89번지 일민미술관과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에 있습니다.
형조 터
위치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 보도

소개
천주교인들이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신앙 증거자들
김범우 토마스
복자 최필공 토마스, 복자 최필제 베드로, 복녀 윤운혜 루치아,
복자 정철상 가롤로 복자 김천애 안드레아,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 남명혁 다미아노,
성녀 김효임 골롬바, 성녀 김효주 아네스, 성 김제준 이냐시오,
성 전장운 요한, 성 최형 베드로

묵상과 기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모든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읍시다.

형조는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입니다.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라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 최필제 베드로 ․ 윤운혜 루치아 ․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 남명혁 다미아노 ․ 김효임 골롬바 ․ 김효주 아네스 ․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습니다. 형조 터 표시는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에서 세종로공원 정문 쪽 도로 바닥에 매입되어 있습니다.
경기감영 터
위치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

소개
‘하느님의 종’ 조용삼이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한 곳

기억해야 할 인물
‘하느님의 종’ 조용삼·최필공·최필제

묵상과 기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경기감영이 설치된 것은 태종 때의 일이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 1395년(태조 4)에 경기 행정편제가 개편되었다. 이때 광주와 수원의 관할인 군현을 갈라서 경기좌도라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경기 우도로 했습니다. 그 후 1413년에 경기 영역을 다시 한 번 조정하여 좌․우도로 나누지 않고 경기로 확정하면서 도관찰사를 파견하였고, 감영을 수원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감영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한성부 내 서대문 밖 반송방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던 박해기였지만 점차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홍인 레오 등 체포된 신자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순교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순교자 조용삼입니다. 조용삼은 11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었고,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습니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경기감영 터 표지석은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에 서 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위치
중구 의주로 2가 16번지 서소문 공원 내

소개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정하상, 성 남종삼, 성 유진길

묵상과 기도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주 예수님을 생생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의 정식 이름은 소의문입니다. 서소문 밖의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집행지였는데, 그 광장은 문안에서 아현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거리 광장이었습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막과 주위의 시장은 ‘파루인정제’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즉 아침에 성문이 열리면 도성 출입이 가능하나, 저녁에는 성문을 닫아 통행을 금지하니, 통행인들이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에 이들을 상대로, 성문 밖에 취락이 생겨났고, 광장도 생겨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관에서는 중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마다 군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다수의 군중을 동원하기 쉽고, 또한 사형죄인들이 갇혀 있던 포도청이나 의금부와 가까운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을 사형 집행 장소로 이용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순교자가 처음 생긴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로, 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성 남종삼 요한 등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처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으며, 그중 마흔 네 명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면서 한국 교회사상 가장 많은 성인이 탄생한 곳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중림동 약현 성당
위치
중구 중림동 149-2 (02-362-1891, www.yakhyeon.or.kr)

소개
1892년에 건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

기억해야 할 인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모든 순교자

함께 볼 곳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

묵상과 기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구체적이고 끈기 있게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청합시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를 관할하는 중림동약현 성당은 1891년 11월 9일 명동 본당에서 분리 설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입니다. 규모는 명동 성당보다 작고, 도성문 밖에 위치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한국 최초의 고딕식 교회 건물로 1892년 11월에 건축 공사를 완료하고, 1893년 4월 23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물이며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겸비한 성당 건물로서 1977년 11월 22일자로 ‘국가 사적 제252호’에 지정되었습니다. 한편 1998년에 화재로 내부가 불탔으나 2000년에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약현 본당이 설립된 당시에는 서울에 두 개의 본당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관할 구역은 아주 광범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 도성의 경계였던 사대문을 기준으로 종현 본당은 도성 안을, 약현 본당은 사대문 밖의 전 지역을 관할하였고, 약현 본당은 가깝게는 도성 주변의 서울 지역과 경기도 일대, 멀게는 지금은 북한 지역인 개성을 지나 황해도 배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였습니다.
성당 내에 있는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은 1991년 3월에 개관하였다가 지난 2009년에 성당 내 피정 집을 수리하여 재개관하였습니다. 전시실에는 초기 한국 교회천주교회의 4대 박해 당시 순교한 신자들이 사용하던 교리서, 신심서적 등이 있으며, 특히 서소문 순교자인 강완숙의 가계도,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서류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미사용 제구, 나무 제대, 약현 성당 목재 종틀, 성당에서 사용하던 오르간, 1998년 성당 화재로 검게 탄 성당 제대와 성모상 등이 전시되어 있고 약현 본당 출신 신부로 만주에서 사목하다 선종한 김선영 신부의 유해와 친필 서한 등도 전시되어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입니다.